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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행복한삶을담는집이야기

우리 식구가 행복하게 살 집을 설계해 주세요

나는 가끔 건축사 동료들에게 농담 같은 진담으로 물어본다. 건축주가 설계 의뢰를 하면서 딱 하나의 조건만 동의를 해준다면 건축사가 원하는 설계비로 계약을 하겠다고 한다. 그 조건은 ‘우리 식구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집’이라고 하는데 계약을 할 수 있을까?

 

대다수의 동료 건축사들은 무슨 그런 설계 조건이 있느냐며 반문을 했다. 혹은 그 조건을 수락하겠다며 계약을 하고 잘 협의를 해가면서 진행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대답하는 동료도 있다. 그 대답을 하는 동료 건축사에게 건축주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집은 어떤 집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겠느냐고 물어보니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 식구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집’

 

 

 

과연 건축사가 자신 있게 그런 집을 설계할 수 있다고 장담하기가 어려운 조건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집을 지으면서 이보다 더 명확하고 절실한 조건이 또 있을까 싶다. 식구들이 누구나 집에 있으면 밖에 나가기 싫고 밖에 나가면 어서 들어오고 싶은 집이면 아마도 그 조건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 그곳이 집

 

내가 30년 간 단독주택을 마흔 채 넘게 설계를 하면서 작업의 목표가 바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이었다. 또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서둘러 돌아오는 곳’이니 ‘밖에서 지내다가 더 늦으면 갈 데가 없어 돌아가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작업 의지라고 할 것이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과 ‘더 늦으면 갈 데가 없어 돌아가는 곳‘은 어떻게 다른 집일까?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집은 명확한 목적지로서 집이다. 집이 아니면 내가 쉴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집이다. 그런데 그 집은 나만 사는 집이 아니라 우리 식구들이 함께 살고 있으니 더 이상 갈 곳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과 '더 늦으면 갈 데가 없어 돌아가는 곳'은 어떻게 다른 집일까?

 

 

 

더 늦으면 갈 데가 없어 돌아가는 집에는 우리 식구가 없다. 밤이 이슥한 시간인데도 불이 켜지지 않는 그 집이다. 집으로 들어가는 시간은 잠잘 때가 되어 더 갈 데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밖에서 돌아가는 목적지가 집이긴 하지만 들어가는 목적이 다르다.

 

밖에서 할 일이 마쳐지는 대로 서둘러 돌아가야 할 집은 우리집이 되고 더 늦으면 갈 데가 없어 돌아가는 집은 어쩌면 내 방일지도 모른다. 우리집에는 식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만 내 집은 내가 들어가야 불이 켜지는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

 

 

삼대가 함께 살 수 있어야 우리집

 

진정한 가족은 할아버지 할머니에 손주가 있어야만 완성될 수 있다. 한 집에 삼대가 함께 살 수 있을까? 아마도 이 질문에 대부분 고개를 저을지도 모르겠다. 아파트라는 집이라면 두말없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잠시 다니러 와도 앉기 바쁘게 일어날 타이밍을 보는 게 사실이니까.

 

삼대가 한 집에 사는 건 세월 탓으로 돌려 어렵다 치자. 그렇다고 해도 손주들이 하룻밤 자고 가는 것마저 쉽지 않은 게 아파트의 현실이다. 그렇지만 단독주택이나 상가주택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손주가 와서 자고 가야 할아버지 할머니와 정이 들어 우리 식구가 된다. 그런데 호적에는 올라 있지만 정을 쌓을 시간을 가지지 못하니 우리 손주라고 부르기가 어색한 세태이다.

 

 

삼대가 한 집에서 함께 사는 게 불가능한 일일까?

 

 

 

이십여 년 전에 養和堂양화당이라 당호를 지었던 단독주택은 삼세대가 사는 집이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서 부부침실과 거실 주방을 하나의 영역으로 두고 손녀 둘이 한방을 쓰는데 할아버지 방과 붙여서 두었다. 며느리와는 동선이 겹치지 않게 하고 손녀들과는 생활 영역이 겹치게 했다.

 

마당을 안고 기역자로 배치했는데 할아버지 방과 손녀의 방은 복도를 두고 미닫이문을 두었다. 밤에 마당에서 보면 할아버지 방 미닫이문에 불이 켜져 있으니 손녀들이 늦게 귀가할 수 없었다. 손주가 집에 들어와야만 할아버지가 주무시니 가능한 귀가를 서둘러야 했다. 식구들이 저녁 밥상에 같이 앉는 게 일상인 집이니 당호처럼 화목한 가정이 되었다.

 

 

준공된지 스무 해가 지난 양화당, 처마가 있는 집이라 깨끗하게 잘 관리되고 있었다.

 

 

할아버지 방에 툇마루가 있어서 뒷뜰로 나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옥상층의 정자와 사랑방은 집을 쓰는 소소한 재미를 가질 수 있다.

 

 

건축사님 덕분입니다.

 

양화당을 근래에 다녀오게 되었는데 그날 마침 건축주께서 집에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건축주 목소리가 들렸고 나라는 걸 확인하고는 버선발로 달려 나오듯이 반겨주셨다. 이십 년이라는 세월에 건축주는 직장에서 은퇴하고 집에서 은거할 나이가 되어 있었다.

 

그날 건축주로부터 이십여 년을 양화당에서 살아온 그동안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르신은 건강하게 사시다가 지난해에 돌아가셨고 아이들은 학업을 잘 마치고 큰 애는 결혼했고 작은 애도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건축주는 이 집의 당호처럼 식구들이 화목하게 잘 지냈으며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게 건축사를 잘 만났기 때문이라며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이 집에서 우리 식구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 건 다 건축사님 덕분입니다.

 

 

 

이제 건축주도 그렇지만 설계자인 나도 손주와 함께 지내는 즐거움 만한 게 없는 나이가 되었다.

 

 

설계 의뢰를 받고 양화당의 가족 구성을 살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설계했던 지난 시간의 보람을 느낄 수 있었던 날이었다. 삼대가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집보다 더한 행복이 또 있을까? 노년에 손주들과 함께 살고, 할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는 아이들은 성품부터 다르다고 한다. 시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 며느리와 한집에 사는 시아버지의 일상을 배려한 설계가 양화당이라는 당호에 맞아떨어진 셈이다.

 

이제 딸들이 아이들과 함께 친정을 다니러 올 것이다.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지내며 삼대가 어우러져 사는 양화당의 가풍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건축사라야만 지어낼 수 있는 일, 집은 행복의 原泉원천임을 양화당에서 느끼게 된다.

 


 

집을 왜 지어서 살아야 하는가? 그 답은 바로 집이야 말로 사람이 살아가며 얻을 수 있는 행복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건축사는 보기에 좋은 집이기보다 집에서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설계를 해야 한다.  자, 이제 다시 처음에 끄집어내었던 질문을 다시 해보자.

 

“우리 식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집을 설계해 줄 수 있습니까?”

 

무설자

 

 

무설자(김정관)는 건축사로서 도반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집은 만들어서 팔고 사는 대상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 지어서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건축설계를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어쩌다 수필가로 등단하여 건축과 차생활에 대한 소소한 생각을 글로 풀어쓰면서 세상과 나눕니다.

차는 우리의 삶에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이만한 매개체가 없다는 마음으로 다반사의 차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김해 양산 지역에 단독주택과 상가주택을 여러 채 설계했으며 부산다운건축상, BJEFZ건축상을 수상했습니다.

집을 지으려고 준비하는 분들이나 이 글에서 궁금한 점을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메일: kahn777@hanmail.net

전화: 051-626-6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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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집이 우리 식구의 행복을 보장 해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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