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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단독주택의얼개짜보기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는 집은 거실이 다르다

아파트에 사는 우리는 거실을 어떻게 쓰고 있을까? 사실 두 말할 것도 없이 대부분 사람들은 거실이라기보다 TV 시청 공간이 되어 있다. 50인치나 60인치 대형 모니터가 벽면에 떡하니 자리하고 그쪽을 향해 긴 소파가 놓여있다. 이런 거실 풍경은 옆집이나 우리집이나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틱낫한 스님이 방한 강연에서 들을 수 있었던 프랑스의 가정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알게 되었다. 저녁밥을 먹고 나면 식구들은 TV 시청을 즐긴다고 한다. 부부만 사는 집도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는 집은 많지 않다고 하니 지구 반대편 가정의 일상도 비슷한가 싶다.

 

틱낫한 스님은 강연에서 우리네 삶에서 마주 보기와 한 방향 보기를 이렇게 말했다. 남녀가 마주 보다가 서로 좋아졌고 인생을 한 방향을 향해 같이 가자며 결혼하고선 마주 보면 싸우기 때문에 TV를 향해 한 방향을 보며 산다고 한다. 스님이 얘기 한 이런 부부의 일상은 프랑스의 경우인데 어쩌면 우리네 부부와 다르지 않은지 희한하기도 하다.     

 

 

우리나라 집과 거실

 

조선시대 집인 한옥에는 거실이 따로 없다. 굳이 거실의 역할을 하는 곳을 지칭하자면 대청마루를 들 수 있지만 마당으로 열려 있는 내부적 외부 공간이라 쓰임새가 제한되기는 하다. 손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랑채가 거실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한옥이 양반들의 집이라면 일반 양민의 집은 민가라고 부른다. 소위 초가삼간이라고 부르는 정지와 안방이 붙어 있고 작은방이 따로 있는 그런 집이다. 민가에서는 안방이 거실의 역할을 겸해 썼다. 

 

아파트가 지어지기 전 한국 전쟁 후에 지어졌던 단독주택은 조선시대 민가의 평면을 그대로 썼다. 평면의 가운데에 마루와 안방이 있어서 거실의 역할을 했고 한편에는 정지, 다른 편에는 작은방이 있었다. TV가 보편화되기 전에는 라디오를 들으며 식구들이 둘러앉아 밥상머리 대화를 나누는 정경이 일상이었다. 

 

 

초가에 살고 있는 지인의 집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안방에서 두레상을 받아 정겨운 아침밥을 먹을 수 있었다.
 
 

거실은 아파트가 보편화되면서 우리 주거 생활에 들어오게 되었다. 주방과 거실이 하나의 영역이 되어 식구들의 방이 면해 있어 방문은 미닫이문으로 늘 닫히게 되었다. 입식 주방이 되면서 식탁이 놓이게 되었지만 근래에는 어쩐 일인지 아침밥은 거르는 집이 많고 저녁밥은 귀가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식탁을 쓸 일이 없는 집이 많다.  

 

거실의 모습도 TV를 향해 놓인 일자형 소파의 역할에 충실하듯이 대화 없이 TV 시청에 집중하고 있다. 이런 집안 분위기라도 집에 가족들이 있으면 다행이라 할 것이 밤이 이슥해지도록 집에 불이 켜지지 않는 집이 자꾸 늘고 있다. 우리나라 집의 거실이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아파트의 거실과 개인 영역

 

사각 박스 안에 거실이 가운데 있고 방은 창에 면해 위치한다. 방문을 열면 거실의 소리가 들어오고 방의 프라이버시는 보장되지 않는다. 그래서 방문은 늘 닫혀 있기 마련이라 아파트는 큰 박스 안에 방이라는 작은 박스에 갇히는 형상이다. 

 

안방은 여유 있는 면적이 주어졌지만 다른 방은 침대와 옷장, 책상을 놓고 나니 옴짝달싹할 여유가 없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작은 줄 몰랐던 방이 고등학생이 되면 몸에 끼는 옷처럼 답답해지기 시작한다. 거실은 채널 권을 쥔 부모가 TV만 볼뿐이니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가 탈출을 감행한다.

 

부모가 거실에서 TV만 보는 것도 문제지만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목소리를 높이게 되면 사각 박스 안은 견디기 어려운 분위기가 되고 만다. 발코니마저 없애버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파트 거실은 집 안의 권력자의 자리가 되어 버렸다.

 

진화를 거듭하며 아파트는 재물을 모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있다. 거실과 안방 영역은 면적을 더 많이 쓰면서 공간의 품격이 더 높아졌다. 발코니 확장까지 합법화되어 더 넓은 면적을 쓰게 된 거실에 식구들은 보이지 않으니 아파트는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집이 아니라는 걸 생각해보게 된다. 

 

 

단독주택의 거실

 

도시는 땅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다 보니 단독주택을 지을 수 있는 대지를 확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아파트에 사는 게 싫은 사람들은 도시의 외곽에 땅을 구해서 단독주택을 짓는다. 도로망이 좋아져서 한 시간 안에 대도시의 상권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원에 단독주택을 지어 살아보면 가장 힘들어하는 게 자주 만나던 사람과 교분이 끊어져 외롭게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물리적인 거리는 멀지만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는 게 도로 사정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파트와 같이 거실이 방과 섞여 있으면 손님이 머물러 있기 불편할 수밖에 없다. 부부만 살아도 어느 남편의 지인이면 아내가 편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손님이 찾아와도 집에 있는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아야 외롭지 않게 살 수 있다. 며느리와 사위가 자주 찾아오면 손주와 정을 붙일 수 있어서 노후의 삶이 행복해질 수 있다. 부부가 한 집에 살아도 각자의 일상이 존중되어야 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다. 박스 안에 갇혀 사는 것 같은 아파트에서 얼굴만 마주해도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는 밀접 접촉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 아닐까 싶다.

 

거실 영역을 방에서 독립시키면 집의 사회적 공간이 살아나고 사적 공간의 사생활이 보장될 수 있다. 식구들이 밖으로 나돌지 않고 집에 있길 좋아하면 그야말로 행복이 샘솟아나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는 집이 될 것이다. House가 아닌 Home이 되는 집으로 살고 싶다면 거실을 주목해 볼 일이다.

 

 

거실채와 침실채를 채 나눔으로 지은 경남 양산 심한재, 침실 채도 아래층은 부부 공간이고 위층은 자식과 손님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사생활이 존중되는 집이다.

 

 

단독주택을 지으면서 아파트와 다름없는 거실 분위기라면 같은 옷을 입고 위치만 이동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아파트에 사는 게 싫어서 단독주택을 지어 산다고 하지만 살고 싶은 집의 얼개를 제대로 구성하지 못하면 沙上樓閣사상누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집의 얼개에서 거실은 인체의 등뼈와 같아서 深思熟考심사숙고를 거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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