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라는 말에는 건축물을 뜻하는 ‘House’와 식구들이 단란하게 지내는 자리라는 ‘Home’이라는 의미가 함께 들어있다. ‘집다운 집’이라는 말은 식구들이 단란하게 지낼 수 있는 건축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집답다는 말에 내포된 의미는 한 마디로 식구들이 집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리라.
동료 건축사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단독주택을 지으려는 건축주가 설계를 의뢰하면서 딱 한 가지 조건만 들어주면 설계비는 충분히 지불하겠다고 한다. 그 조건은 ‘우리 식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집’이라는 것인데 그 설계를 의뢰받을 수 있을까?”
동료 건축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행복하게 사는 건 그 식구들이 그렇게 살아야지 왜 설계자에게 그런 조건을 내세우는 것입니까?”
동료 건축사의 말처럼 식구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건축주의 설계 요청이 우문愚問일까? 내 생각은 그 건축주가 제시한 설계 조건은 당연하다고 본다. 누구든 집을 지으면서 식구들이 함께 사는 행복을 꿈꾸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집의 얼개를 짜는 기획 과정에서 건축주는 그의 식구들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고 나서 본 설계 단계로 진행해야 할 것이다. 건축사는 건축주가 꿈꾸는 집을 현실로 옮겨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살고 싶다는 집에 대한 간절한 바람도 없이 집을 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30분 만에 건축주의 형님이 된 건축사
바다가 보이는 터를 가진 건축주를 만나게 되었다. 지인의 조카사위인 그를 광주에서 만났다. 건축사와 건축주가 설계의 인연을 맺기 위한 상견례의 자리인 셈이다. 이야기가 잘 되면 계약을 할 수도 있는 자리이다 보니 단독주택에 대한 나의 지론持論을 쏟아냈다.
만난 지 30 분 정도 되었나 싶은데 그가 내 말을 끊으며 이렇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
한참 열변을 토하고 있는데 나이를 왜 묻는 걸까? 그에게 내 나이를 얘기하니 이렇게 말을 받는다.
“저보다 연장자시니 제가 건축사님을 형님이라고 부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만난 지 30 분 만에, 그것도 일이 잘 되면 건축주가 될 사람인데 동생으로 삼아달라고 하니 이런 뜬금없는 얘기가 또 있을까? 이어지는 그의 얘기에서 그간의 사정을 들으니 단독주택을 지으려는 간절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부모님과 형제, 그의 가족까지 여덟 명이 한 집에서 살아야 하는 인생 숙제를 단독주택을 지어서 해결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부모 자식이 한 집에서 살기도 쉽지 않은 세태가 아닌가? 그렇다 보니 부모님과 형제, 그의 가족이 어울려 잘 살 수 있는 집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그 길을 찾아줄 수 있는 건축사를 백방으로 찾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오늘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얘기를 들으면서 이 사람이라는 확신이 서서 그런 제안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건축주와 건축사가 아니라 자신의 형님이 되어 아우의 인생 숙제를 해결해 달라는 얘기였다. 사실 나는 아우보다 좋은 건축주로 인연이 되길 바라는데 억지로 형제의 인연을 맺었다. 이 집을 지어야 하는 그의 처지는 간절하다 못해 절박하지 않은가 싶었다.
건축주의 인생 숙제를 풀어내는 작업
그의 직업은 치과의사였는데 얘기를 듣자 하니 보통 고된 일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환자들을 진료하고 귀가해서 지친 몸을 편히 쉬어야 하는데 대가족이 함께 사는 아파트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덟 명이나 되는 가족 구성원이 갈등 없이 지낼 수 있고, 자신도 편하게 쉴 수 있는 집을 지어야 한다는 숙제를 위임, 아니 떠안는 일을 맡게 되었다.
설계기간은 이 년, 설계비는 인생 숙제를 풀어내는 대가이니 ‘형님’이 알아서 정하라고 했다. 백지 수표처럼 계약서의 설계비 란에 알아서 쓰면 된다는 것이다. 준비해 갔던 견적서의 금액을 내가 깎아서 써넣었다. 이 숙제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되지만 억지 형님이 되었지만 아우의 일에 욕심을 더 할 수는 없었다.
그가 준비한 땅은 새로 조성한 택지의 맨 위라서 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하지만 주변에 집이 다 지어지면 바다가 보이는 건 고사하고 사방이 다 막히게 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현재의 여건만 보면 바다가 보이는 집을 지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땅인가? 아우 건축주는 즉시 시야를 가로막는 앞 땅을 추가로 매입해서 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여 이 년의 설계 작업 대장정에 들어갔다.
여덟 명의 식구, 다섯 개의 방과 거실 두 개
이 집의 큰 얼개는 세 채의 집을 하나로 묶고, 내부에서 영역을 나누어 연결해서 짜졌다. 부모님과 형제는 일층 세대로 마당과 하나가 되는 영역, 건축주 식구는 이층 세대가 되고 두 세대는 계단을 가운데 두고 중층에 거실을 공유하도록 했다. 중층의 거실 상부에 아우 건축주의 사실私室을 두어서 가족을 벗어나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배려했다.
일층과 이층을 연결하는 계단참에 주거실主居室이 있으므로 일이층 세대가 공유할 수 있게 했다. 거실에 바다로 열리는 데크를 두었으므로 독립된 가족들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공간을 쓰게 되었다. 거실에서 아우 건축주가 손님을 맞이하면 부모님은 일층 세대의 거실로 내려가면 된다.
거실 위층에 있는 아우 건축주의 사실私室은 기도실이 딸려 있다. 신앙이 깊은 아우 건축주는 안팎의 시름을 기도실에서 해소할 수 있으리라는 형의 배려라는 것을 알까 모르겠다. 또 사실은 발코니를 두었는데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기도로 해소되지 않는 게 있으면 덜어내면 좋겠다.
이 년에 걸친 설계 기간 동안 위임받은 아우의 인생 숙제를 해결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가?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빼면서, 그리고 지우고 또 그리는 안案이 몇 장이나 되는지 셀 수도 없다. 세상의 일이 다 그렇겠지만 미완성일 수밖에 없지만 아우 건축주의 숙제는 주어진 시간에 끝이 났고 다행히 그는 아주 만족해했다. 이제 남은 건 도면대로 집이 지어지는 일인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공사 중에 변경 없이 설계도면대로 지어지는 경우가 참 어렵다. 그 변경 내용이 경미하면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설계자와 협의 없이 외장재를 바꾸고 평면을 변경하는 수준이면 걷잡을 수가 없다. 도면대로 집이 지어졌다면 지난 시간의 드라마 같은 얘기를 책을 써보려고 했는데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지만 내부 공간은 그대로 지어졌으니 아우 건축주가 건축사를 형이라 부르며 당부했던 그의 바람은 이루어졌으리라 믿는다. 외관이 도면대로 나와서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설계자인 나의 바람은 욕심이 되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왜 열 번째 이야기로 썼을까? 설계 과정은 집을 지으려는 간절한 바람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그림 같은 집보다는 소설 같은, 드라마나 영화처럼 시놉시스가 있는 설계라야 어떻게 살 수 있는 집인지 알고 지을 수 있다. 설계 과정의 첫 단계를 기획 설계라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지어진 집에서 어떻게 살 수 있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림 같은 집, 소설 같은 집
어떤 조건으로 설계된 집에서 살아야 행복할까?
건축주는 설계자에게 어떤 조건을 제시해야 할까? 그림 같은 집이어야 할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집이라고 해야 할까? 그림 같은 집은 이미지 검색으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만 우리 식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집을 어떻게 찾아내야 할지 잘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무설자(김정관)는 건축사로서 도반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집은 만들어서 팔고 사는 대상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 지어서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건축설계를 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수필가로 등단을 하여 건축과 차생활에 대한 소소한 생각을 글로 풀어쓰면서 세상과 나눕니다.
차는 우리의 삶에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이만한 매개체가 없다는 마음으로 다반사로 차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집을 지으려고 준비하는 분들이나 이 글에서 궁금한 점을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메일: kahn777@hanmail.net
전화: 051-626-6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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