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주택을 지으려는 사람은 예외 없이 넘치게 공부를 하고 건축사를 찾아온다. 요즘은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얻고 싶은 정보의 키워드만 치면 무한대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예전에는 책을 통하거나 직접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아다녀야 했지만 지금은 TV 프로그램이나 유튜브로 생생한 실물 정보를 해설까지 들을 수 있다.
건축주라면 우리 식구가 살 집이니 미리 공부를 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컴퓨터 작업에 능숙한 젊은 사람들이라면 스케치업 프로그램으로 이미지 작업까지 할 수 있는 세상이다. 정보 검색으로 알게 된 내용을 바탕으로 완성된 계획안을 들고 찾아온 건축주를 건축사는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죽은 사람만 아니면 어떤 병도 치유할 수 있다던 명의 ‘화타’도 고치지 못하는 환자가 있다고 한다. 그 환자는 스스로 자기의 병을 진단하고 의사의 말을 믿으려 들지 않는 사람이다. 건축사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스스로 만든 계획안을 고집하는 건축주를 이길 수 없다.
‘내 집’은 없다
집은 지어지고 나면 최소한 백 년은 써야 한다. 오래된 도시는 연륜만큼 오래된 집이 많다.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에는 수백 년 된 고택이 잘 보전되어 지금도 오래된 집을 고쳐가면서 살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도 경주 양동마을에는 옛집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한 눈요기 대상이 아니라 주거 생활을 하고 있다.
집을 짓고 나서 백 년을 쓴다고 보면 나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지을 수 있을까? 집에는 나만 사는 게 아니라 부부가 살고 자식도 함께 살고 훗날에는 집을 물려받은 사람이 산다. 백 년이 지나도 고쳐가면서 살 수 있게 지어야 한다면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며 지어서 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또 집은 지어지고 나면 부동산이라는 자산이 된다. 내가 마음에 들면 그만이라며 지은 집을 나 아닌 다른 사람까지 만족할 수 있을까? 어떤 사정으로 집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는 누구라도 탐내는 집이 아니라면 매매가 뜻대로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집은 ‘내 집’이 아니라 최소한 ‘우리집’으로 지어야 하며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집’이라야 ‘百年家백년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년가’를 지으려면 건축주는 어떤 입장으로 설계에 임해야 할까?
‘좋은 집’으로 지으려면
집의 용도마다 설계 과정에서 건축주가 관여하는 분위기가 다르다. 집을 지어서 파는 사업자가 건축주라면 당연히 수익성에 초점을 둔 설계를 요구할 것이다. 분양가 대비 투자가 적게 되는 설계 라야 만 수익성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단독주택의 설계 목표는 우리 식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집이 되어야 한다. 집 짓기를 주도하는 식구 중의 한 사람이 고집하는 집이 되어 버린다면 나머지 식구들은 불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또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머무르기가 편치 않다면 외롭게 살 수밖에 없다.
우리집을 찾는 손님 중에 가장 귀한 사람은 누구일까? 손주와 함께 오는 며느리와 사위가 아닐까 싶다. 자식들이 찾아와서 하룻밤을 편히 지내고 갈 수 있는 집이라면 어떤 손님이라도 만족할 수 있는 집이라고 할 수 있다.
단독주택은 이처럼 누구라도 머물기 편하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행복해야 한다. 즉 한 사람의 주관으로 지어지는 집이 아니라 부부가 살아도 좋고, 자식들과 지내기도 편하면 어떤 손님이라도 기꺼이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객관적인 집이라야 한다. 누가 살아도 좋은 집, 누구와 함께 지내도 편한 객관적인 집은 건축사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건축주의 식구들이 바라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서 계획안에 담아내어 설계의 바탕을 삼는다. 이 과정이 지나고 나면 그다음은 건축사의 역량을 믿고 위임해 주어야 한다. 건축주가 설계 과정에 일일이 관여하게 되면 식구끼리 의견 차이가 합의점에 이르기 어려운 경우도 생기게 된다.
건축주가 연필을 들면
‘내가 살 집이니 내 마음대로 하면 안 되나요?’라는 식으로 건축사가 작업하는 전 과정에 관여하려는 건축주가 있다. 건축주가 연필을 들고 선을 그으며 관여하게 되면 건축사는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안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의견을 주는 건 당연하지만 작업에 직접 개입하는 건 건축사의 권한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까 싶다.
목수가 작업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목수를 바꿔야지 망치를 뺏어 건축주가 망치질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건축주와 건축사의 계약서 상 관계는 갑과 을이지만 갑질을 하는 건 을에 대한 온당한 처사가 아니지 않은가? 갑은 권리만 가지는 게 아니라 을이 하는 일에 대해 존중해야 할 의무도 있다. 을도 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갑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리가 있으니 이 권리는 갑이 지켜줘야 할 것이다.
30년 이상 건축사로 설계를 해 오면서 작품이라고 남길 집을 돌아보니 건축주가 갑의 권리보다 을의 위치를 존중해 준 정도만큼, 딱 그만큼 결과가 나왔다. 감히 작품이라고 내세울 몇 안 되는 결과들에는 설계부터 시공까지 시종일관 나의 역량을 존중해 준 건축주가 있었다.
건축주가 건축사를 무시한다면 스스로 눈을 찌르는 선택을 한 것이다. 건축주가 시공자를 믿지 않는다면 그건 아마도 공사비가 제대로 책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건축주가 져야 할 가장 큰 의무는 집짓기에 참여하는 전문가를 존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집은 이런 집이다.
‘좋은 집’은 누구나 살기 좋은 집이다. ‘좋은 집’은 오래 쓸 수 있는 집이다. ‘좋은 집’은 그 집에 사는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집이다. 그래서 ‘좋은 집’은 주관적인 기준으로 지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좋아할 객관적 기준으로 짓는 집이 되려면 전문가의 역량이 발휘되어야 하며, 건축주는 그 전문가를 찾아 믿음으로 일을 맡겨야 한다. 건축사가 만든 설계도대로 시공자가 능동적으로 지을 때 ‘좋은 집’을 지을 수 있다.
건축주가 ‘내가 살 집인데 내 마음대로 하는데 왜 그래’라고 함부로 전문가를 경시하는 집이 어떤 집이 될지는 明若觀火명약관화하다. ‘좋은 집’은 건축주가 내어주는 자리의 여유만큼 전문가가 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축주와 건축사, 설계자는 집짓기에서 아래위가 없는 동등한 위치가 된다면 그 집은 시작부터 이미 좋은 집이 지어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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