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룸 투룸 쓰리룸, ‘룸주거’에 사는 사람들
뉴스를 듣고 보기가 두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죽음으로 내모는 소식이 심심찮게 뉴스로 보도된다. 이런 패륜이 일어나는 이유는 대부분 돈 때문이라고 한다. 돈이 필요해서 가족을 대상으로 우발적인 것도 아닌 계획적인 범죄를 저지르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뿐 아니라 교사가 학생을 성범죄의 대상으로 삼고 학생이 스승을 향해 막말을 하다못해 주먹까지 휘두르는 일은 또 어떤가? 어린이집에 맡겨진 유아들을 교사들이 보육이 아닌 폭력을 쓰는 일도 이 세상이 얼마나 잘못되어 가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인간관계의 근간이 되어야 하는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스승과 제자가 제 위치를 망각하고 해야 할 일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무서운 세상이 되어버린 원인을 많은 전문가들은 인성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개인주의의 팽배는 공동체 의식을 도외시하고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손해가 가면 목소리를 높인다. 극단적 이기주의가 확산되면서 공동체 의식이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위아래가 엄연했던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인지 모두가 동등하다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 결과 집에서는 가장의 자리가 불분명해지고 학교는 스승의 역할을 잃고 교사나 교수라는 직업인이 될 수밖에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가장이 없는 집, 스승도 없는 학교에서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도리인 윤리나 도덕을 배울 수 있을 리 만무하니 세상은 갈수록 더 흉흉하게 될 것은 명약관화하지 않은가?
인성교육의 기초가 되는 가정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하나로 집이 집답지 못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라 생각해 본다. ‘집이면 다 집인가?’라고 이야기를 시작해본다.
House와 Home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 중의 하나인 ‘집’은 house가 아니라 home이다. 밖에서 일을 마치고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서둘러 돌아가는 ‘집’, 타향에서 살면서 눈물 지으며 그리워하는 ‘집’, 갓 결혼해서 새 생활이 익숙해지기까지는 집이 그리워서 눈물 지으며 떠올리는 그 ‘집’이다. 그 ‘집’이 언제부턴가 사라져가고 있다.
어떤 근거로 home인 집이 줄어들다 못해 사라져가고 있다하는가? 집이란 모름지기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 식구들이 모여서 한 끼라도 밥을 함께 먹는 곳이라야 할 것이다. 식탁에 마주 앉아야만 지난 하루의 이야기를 나누든지 식구들이 오늘 지낼 일을 서로 공유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런데 하루에 한 끼의 밥도 식구들과 먹지 않는다면 일주일, 한 달에 몇 번이나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수 있겠는가?
밤 아홉시가 넘어 아파트를 올려다보면 불이 켜지지 않은 가구가 점점 더 느는 것 같다. 불이 켜지지 않았다는 건 그 시간까지 가족 중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겠다. 가족들이 잠 잘 시간이 되어야 들어온다면 한집에 살긴 하지만 식구라고 할 수 있을까?
식구를 사전에서는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밥을 같이 먹지 않아서 대화가 끊어진 집의 구성원은 더 이상 식구가 아니라는 말이다. 식구가 되지 못하는 가족이 사는 집, house는 되겠지만 home으로서의 집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말에 힘이 실리지 않는가? 식구가 없는 집에서는 방을 쓰는 구성원들만 있으니 결국 ‘룸주택’이 나오리라 예측될 수 있었다.
사라지고 있는 정서가 담긴 ‘집’
우리가 주로 단독주택에서 살았을 때는 아파트를 닭장이라고 표현하며 바람직하지 않은 주거라는 눈길을 주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오래된 단독주택을 제외하면 거의 아파트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독주택을 허물고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서서히 ‘집’은 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 아닐까?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집에서 방은 다목적 기능을 수행했다. 그래서 안방은 거실과 식당, 심지어 객실로도 쓰임새를 가졌다. 다른 방은 방 하나에 두 명 이상 같이 쓰기도 했으니 건넌방, 큰방, 작은방으로 공동으로 방을 쓰는 주거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파트가 등장하면서 서양식 가옥의 거실과 식당이 평면에 도입되었고 방은 가족 구성원의 개개인의 단순 침실 기능만 가지게 되어 개인의 사적공간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가족중심의 생활패턴이 개인화되는 쪽으로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방을 공동으로 사용하며 ‘삼세대’ 주거 생활이 일상이었던 집이 ‘이세대’로 한정되다가 부부만 쓰는 쪽으로 급속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가족 붕괴 현상은 방 하나만으로 구성된 원룸주택의 수요를 부추기고 말았다.
2인 이하 가구 수의 급속한 증가가 부른 원룸, 투룸이라는 이름의 초소형 공동주택은 더 이상 ‘집’이라는 최소한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정주성定住性의 단독주택에서 이주성移住性의 아파트로 바뀐 주거패턴으로 마을공동체 의식이 약해지기 시작했는데 원룸 은최소한의 정주 개념마저 없애 버리고 말았다.
도시형 생활주택, ‘룸주거’는?
도시형 생활주택은 2009년부터 법적인 이름을 부여받고 나온 방 하나만으로 주택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시대의 대세 주거이다. 소위 원룸주거인데 그 인기가 그칠 줄 모르게 올라가자 그 여세를 몰아 ‘투룸’으로 도시형 생활주택 시즌2가 오픈되었다. 이 ‘룸주택 시리즈’ 주거는 개발되지 못했던 도시의 후미진 골목 안까지 거의 싹쓸이하다시피 지어졌다.
원, 투, 쓰리룸으로 불리는 도시형 생활주택은 방시리즈 주택의 종결판이라 해야 할까? 이 방 시리즈는 아마도 노래방으로 시작했던 것 같은데 PC방, 비디오방 등 온갖 유흥꺼리를 담은 퇴폐업소의 이름으로 무르익어 가더니 마침내 도시형 생활주택이라는 이름을 달고 들어와서 가족해체를 가속화시켰다.
원룸 주거는 도시형 생활주택이라는 법적인 근거에 의해 공급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출발은 오피스텔이다. 주거겸용 사무공간인 오피스텔은 사무공간이 우선되고 주거는 편의 차원으로 쓰도록 한 것이 공식적인 용도이다. 그런데 오피스텔이 사무 공간 우선이라는 원래의 취지가 무색해지고 소형주택으로 쓰임새가 늘어나게 되자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여 소형주택으로 양성화한 것이 도시형 생활주택인 것이다.
주차장 설치기준이 대폭 완화된 법적인 근거가 마련되자 200평 내외의 규모로 가히 폭발적으로 도시의 비어져 있는 땅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기몰이로 빈 땅이 동이 나자 단독 주택지가 융단폭격을 맞듯이 오래된 주택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까지 도시형 생활주택이 점거해 버렸다.
빈 땅만 있으면 지어지는 원룸 빌딩, 도시의 구석구석을 헤집고 들어가 사람을 불러들인다. 아파트는 부부만 빈방과 함께 남아 있는데 그 부부의 자식들과 부모는 집이랄 수 없는 룸주거에 산다. 도시스타일 주택의 대세처럼 룸주거가 지어지고 있는데 그곳에서 사람들은 시들어가듯 살아가고 있다.
사람이 집을 짓지만 나중에는 집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집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는 건 생활의 가치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집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정서에 맞아야만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아파트는 아파트일 뿐 집이라고 부르기를 망설이게 된다. 손주들이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광고의 멘트는 아파트살이의 슬픈 풍경이다. 출가한 자식들이 왔는데도 오래 머무르면 서로 불편해서 어서 갔으면 한다니 얼마나 기가 막힌 얘기인가?
아파트가 이럴 진데 노부모가 룸주거에 산다고 하면 자식들이 찾아와도 함께 있을 집이 되지 못한다. 자식들과 살지도 못하는 노인들은 룸주거에서 쓸쓸하고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다. 사람이 사는 집이라 할 최소한의 의미마저 보이지 않는 ‘룸주거’는 삶을 갉아먹는 ‘주거 바이러스’처럼 보이니 이를 어떡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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