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비들은 작은 집에 청빈하게 사는 것을 덕목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를 일컬어 근근이 비를 가린다는 뜻의 비우(庇雨) 사상이라 하는데, 일례로 '지봉유설' 등 명저를 남긴 석학 이수광이 그 사상과 유적을 남기기 위해 주춧돌 위에 조촐하게 초우를 복고하여 그 당호를 비우당(庇雨堂)이라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그와 같은 사상은 '십 년을 경영하야 초려삼간 지었나니/ 반 칸은 청풍이요 반 칸은 명월이라/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라고 노래한 사계 김장생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집은 비워져 있고 오히려 집 주변의 청풍명월이 집을 채운다. 거기서 집은 한 그루 나무처럼 자연의 일부로 존재한다.
소월은 또 이렇게 노래한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시인은 아예 문법을 던져버리고 ‘강변 살자’고 한다. 강변에 있는 집에 살자는 것이 아니라, 강변을 살자는 것이다. 그에게 집은 필요하나,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닌 듯하다. 강변을 보고, 느끼며 누릴 수 있는 가치가 더 소중하다는 생각 때문일 게다. 뜰과 뒷문 밖이 어떤 모습으로 구성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 집은 물리적으로는 왜소할지 모르나, 정서적으로는 해와 바람에 닿을 만큼 넓고 높기만 하다.
집이 자연과 우주를 향해 닫혀있지 않고 열려있는 모습으로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도심을 떠나 전원생활을 꿈꾸며 지은 집이 이러한 감각적인 대상을 앞에 두고도 그 가치를 모른 채,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전원에 지었다는 사실만으로 전원주택일 수는 없다. 자연의 은총을 더 소중하고 고맙게 생각할 수 있는 집. 전기불도, TV도 모두 끄고 촛불을 밝혀, 몸이 이끄는 대로 그냥 있어보라.
- 집, 감각의 제국/김억중 (미디어대전 2016.6.20.)
집 짓기는 자연을 점유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집을 짓는다는 건 주어진 대지 안에 건물만 배치하는 것이 아니다. 대지가 위치하는 주변의 입지여건을 잘 살펴서 자연과의 관계를 읽어내고 가능한 주변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도록 애써야 한다. 땅을 밟고 생활하는 단독주택에서는 내부 공간만 쓰기 위해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외부공간의 역할을 어떻게 찾아내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그 집이 가지는 고유한 의미는 땅이 주는 조건인 터무늬에서 비롯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독주택에서 집의 안과 밖이 연계되면서 생성되는 공간의 풍요로움은 집을 쓰는 의미를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특히 전원에 짓는 단독주택이라면 외부공간을 자연의 모든 요소와 연관시켜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건물의 배치에서 외부공간과 이어지는 자연적인 요소를 감안할수록 내부 공간의 분위기는 더욱 풍성해진다.
전원에 짓는 단독주택은 터무늬를 잘 읽어서 자연환경을 거스르지 않아야 하며 집의 안팎이 하나 되는 공간 얼개를 짜야 한다
‘반칸은 청풍이요 반칸은 명월이라 /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는 김장생의 시구를 살펴본다. 이 시구를 염두에 두고 집 짓기를 준비한다면 어떤 설계가 나오게 될까? 바람은 집 안 어디라도 자연스럽게 흘러야 한다. 바람이 들지 않는 집은 여름을 에어컨으로 버텨야 하니 자연의 순리에 역행하게 된다. 달빛도 그러하거니와 햇볕이 제대로 들지 않거나 여름 햇살을 긋지 못하는 집은 계절이 베푸는 은혜를 외면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반칸을 청풍에 내어주고 반칸은 명월에 내어준다는 의미를 바람과 햇볕, 자연의 소리를 집에 제대로 담아내는 것으로 읽어본다. 바람이 잘 드나들고 햇볕도 잘 들도록 하는 것은 집 짓기의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것이다. 물론 여름에는 뜨거운 햇살이 들지 않아야 하겠다. 집을 설계할 때 자연의 요소를 잘 살펴서 충분히 담아내는 것이 집 짓기의 바탕이라 하겠다.
설계를 하면서 크고 작은 외부공간을 쓸모 있도록 챙기는 건 자연을 잘 받아들이는 팁이다. 일반적으로는 건물을 대지의 뒤편으로 바짝 붙여 앉히고, 앞으로 넓은 마당을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배치를 끝낸다면 외부공간은 넓은 마당 하나만 있는 집이 된다. 평면을 아파트를 변형시켜 구성하고 외관을 멋들어지게 꾸며서 지은 집이라면 도심지나 전원이나 큰 차이가 없다. 여유가 있는 토지에 단독주택을 짓는다면 건물만큼 외부공간의 구성에 관심을 가져야 자연과 어우러지는 집이라 할 것이다.
설계를 하면서 크고 작은 외부공간을 쓸모 있도록 챙기는 건 자연과 집이 하나 되게 하는 팁이다
잔디 깔린 넓은 마당 하나만 덜렁 있는 집보다 연못이 딸린 작은 뜰이나 뒤뜰에 툇마루로 이어진 방의 느낌은 어떨까? 넓은 마당에 잔디를 심어두면 보기에는 좋겠지만 그 대가로 주어지는 잔디 관리가 만만한 일은 아니다. 주방의 다용도실과 이어지는 여유 있는 뒷마당은 단독주택에서 꼭 필요한 공간이다. 이 뒷마당에 면한 텃밭과 장독대는 한 세트로 봐야 할 것이다. 이 공간은 행복한 삶을 위해 생산기능을 담당하므로 특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모양새에 치중하기보다 즐겁고 따스한 삶을 담을 수 있는 집은 어떠해야 할지 요모조모 살펴야 한다. 단독주택을 짓기 위해 터를 찾는 건 어쩌면 외부공간을 잘 쓰기 위함이지 않을까? 자연과 닿아있는 터라면 더욱 외부공간의 구성에 집중해야 하리라.
집이 자연과 합일이 되어야 도심을 떠나 전원에서 사는 즐거움이 함께 할 것이다. 감성의 문을 활짝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집이라야 도시를 떠났다고 할 수 있다. 대지의 위치만으로 전원생활을 한다 할 수 있겠는가? 자연의 혜택을 더 소중히 여기고 그 일상을 고마워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그야말로 ‘우리집’에서 산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집 짓기를 시작해서 설계도가 완성되었으면 전등도, TV도 끄고 촛불을 밝혀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냥 있을 때 어떠한지 상상하고 느껴보자. 여기가 우리 식구들의 행복을 담아낼 ‘우리집’인가 떠올려 볼 일이다.
무설자는 건축사로서 도반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집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어서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건축설계를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어쩌다 수필가로 등단을 하여 건축과 차생활에 대한 소소한 생각을 글로 풀어쓰면서 세상과 나눕니다.
차는 우리의 삶에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이만한 매개체가 없다는 마음으로 다반사로 차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집을 지으려고 준비하는 분들이나 이 글에서 궁금한 점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메일: kahn777@hanmail.net
전화: 051-626-6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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