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 오랜 H스님이 회주로 계신 절의 큰 법당 준공법회에 초청장을 받아서 먼길을 나서게 되었다.
그 절은 충청북도 충주에 있으니 부산에서는 거의 400km에 이르는 먼 길이다.
H스님과는 일년에 한번도 만나지지 않으면서도 30년 가까운 시간의 인연을 지속해 왔다는 건 참 쉽지 않은 일이다.
H스님이 충주에서 절을 시작했을 때 다녀왔었는데 참 허술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불사를 진행했는지 궁금하였다.
학자 풍의 잔잔한 호수물결같은 성품을 지닌 그 스님은 소위 말하는 '중냄새'가 나지 않아서 출가자의 면모가 아직 느껴지는 분이었다.
'중냄새'...비구계만 받고 나면 공부에는 관심을 끊고 승복을 벼슬아치들의 관복이나 되는 것처럼 행세하는 모습을 이르는데 참 드물게도 출가한 세월이 얼마인데도 늘 여여한 초발심을 보여주는 분이었다.
4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차를 직접 운전하면서 가는 길, 아마도 아주 특별한 인연이 아니면 나서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H스님은 늘 나를 잊지 않고 안부를 물어 왔을 뿐 아니라 그 분이 소개를 해서 설계 일을 수임하기도 했으니 이런 길이 어찌 멀다고 할까?
그래도 400km는 먼 길임에 틀림이 없어서 예정 시간을 30분이나 넘겨서 절에 도착하니 준공법회는 이미 시작하고 있었다.
간선도로에서 부터 갓길에 주차된 대형버스에서부터 승용차들을 보자니 이미 큰 절이 되어 있음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불자가 많지 않은 충청북도에서 이만큼 주목을 받는 절을 만들었다면 모르긴 해도 특별한 노력이 있었으리라.
이 시대의 종교, 불교와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기를 바랄까?
불교는 왜 점점 이 시대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처럼 보이며 개신교의 지나친 득세에 느껴지는 거부감은 어떤 의미일까?
그래서 H스님의 느낌 상의 성공은 어떤 특별한 결과물로서 준공된 절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같은 것을 가지고 절로 향했다.
평소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절로 진입하는 길 주변의 공터까지 주차된 차를 보면서 충북에 이렇게 불교가 흥한 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색천으로 장식된 준공법회장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격식을 잘 갖춰서 학자 풍의 스님 면모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묘법보궁'이라고 이름지은 큰 법당을 무대 삼아서 왼쪽에는 합창단이, 오른쪽에는 국악현악팀을 두고 불교행사에 어울리는 연출로 사찰행사에 어울리는 연출을 기획하였을 스님을 생각하며 역시라는 탄성을 내질렀다.
적당한 크기의 마당을 중심으로 큰 법당에서 오른쪽에는 작은 전각을 배열하고 왼쪽에는 스님의 처소인 요사채를 둔 전형적인 전통사찰의 배치를 따라서 지은 것 같았다.
절을 쭉 둘러보고 행사장에 앉아있는 분들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대부분 할머니들이었으며 젊은 사람들은 거의 볼 수 없었다.
그 행사장에 앉아 있었던 분들의 분포처럼 충청, 전라 지역의 불교란 연세가 있는 분들 기억 속의 종교로 전락하고 만 것일까?
H스님을 처음 만나게 되었던 것은 스님이 출가하기 전에 불교단체의 현대식 법당을 지으면서 그 불사의 실무책임자였고 나는 설계 기획자로 인연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때가 언제 였던가?
시대에 맞는 사찰을 어떻게 지어야 할 것인지 함께 고민했던 그 당사자는 어디로 가고 이렇게 세월이 지났는데 '고리타분'한 집이라야 사찰이라는 인식을 벗지 못하는 '중물'이 어쩔 수 없이 들어버린 것일까?
준공법회가 있었던 그 전날에 가을인데도 여름비처럼 비가 많이 왔었다.
만약 그 비가 하루만 미뤄서 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준비된 모든 일이 다 틀어져 버렸을 것이다.
왜 불교는 목조 기와집이라야 사찰, 절이라는 인식에서 자우로워지지 못하는 것일까?
평당 2,000만원이상 들여서 짓는 집을 현대식 재료로 지으면 냉난방의 지원과 공간의 확대를 통해 신도들을 위해 배려하는 효율이 높은 사찰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기와집이 아니면 절이라 아니라는 인식, 신도들은 절에 와서 대웅전에서 기도만 하면 된다는 단순 사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얼마가지 않아서 경상도에서도 불교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부처를 형상을 보려하지 말고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이 부처를 보는 것이라고 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당부는 어디로 간 것일까?
천불, 만불을 조성하고, 동양 최대, 세계 최대 규모의 불상을 만들어 드러내며, 기와집만이 사찰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불교는 점점 그 자리를 기독교에 뺏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계종 전국 교구 본사를 찾는 사찰 순례단은 언제까지 올 수 있을까?
겨우 불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경상도의 불자들이 언제까지 그 산속의 절을 찾아 시주를 하고 그 돈으로 젛을 유지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산 속에 있는 기와집, 그만큼만 잘 유지하고 보수하여 지키면 될 것이며 새로 짓는 절은 모두 이 시대에 맞는 현대식 건물이어야 한다.
새로 짓는 성당이나 교회 건물은 이제 더 이상 예전의 뾰족 지붕을 하지 않는데 왜 아직도 우리 불교는 이렇게 과거에 묶여서 사는 것일까?
그동안 뵙지 못하고 음성으로 확인했던 H스님,
승복을 입은 그 세월은 어쩔 수 없이 '중물'이 들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일까?
무형문화재인 대목과 단청장 등 문화재급 장인들이 참여한 불사는 그 형태는 정말 이대로 오랜 뒤에 또 하나의 문화재가 될 수 있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쓰기에 너무나 불편하고 구태의연한 이 건물이 왜 이 시대에 지어져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결과를 보며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이 시대의 사찰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그 대답은 간단한데 바로 어떤 형식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정해진 형식에서 자유로워져야 이 시대에 맞는 불사건축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스님들이 승복은 쉽게 바꾸지 못할지라도 불법을 담는 그릇인 사찰은 이 시대에 맞도록 바꿔야 할 것이다.
목조기와집은 이제 더 이상 고집해서 짓지말고 산속이라고 하더라도 시대에 맞는 기능을 충족할 수 있는 사찰이 지어져야 하리라.
신도 없는 불교가 곧 도래할 것이라는 인식을 뼈저리게 느낀다면 구닥다리 목조기와집으로 사찰을 새로 짓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될 것이다.
100명의 대중도 한 공간에 모으기 어려운 이 시대의 사찰,
절을 찾는 이들이 차 한 잔 편하게 마실 수 있는 공간 마저도 배려하지 못하는 인색한 공간 여건,
비 바람, 찬바람과 여름더위에도 외부에서 법회를 보아야하는 집회 공간의 현실이 우리 사찰 공간의 현재이다.
H스님이 새로 지어서 준공법회를 본 사찰도 이 현실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것을 보면서 갑갑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H스님 뿐 아니라 도심 한가운데 새로 짓는 절들이 아직도 이 기와집을 고집하고 있으니 오래 전부터 건축물의 경쟁에서 기독교에 밀려 왔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건축설계를 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불교가 목조기와집을 포기하지 않는 그만큼 뒤떨어진 종교로 빨리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가슴 아픈 예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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