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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행복한삶을담는집이야기

집, 그 바탕으로서의 無, 屬性으로서의 空

행복한 삶을 담는 집 이야기 200103

, 그 바탕으로서의 , 屬性으로서의 

김 정 관

 

無와 空을 담아 지은 옛집-양동마을 관가정은 500년의 세월을 안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無 , 한자를 그대로 읽어낸다면 없다  있다라는 의 상대어이며 비어있음  눈에 보이는 모습이라는 의 상대어가 된다. 하지만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무는 유를 드러내게 하는 근원이며 불교에서 공은 색의 속성屬性으로 본다. 즉 존재로서의 유는 근원으로서의 무를 바탕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며, 눈으로 볼 수 있는 색은 한시적인 모습일 뿐 그 속성은 끊임없이 변해가므로 공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형태로서 드러나는 것인 와 색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는 보이는 것만으로는 읽어내기 어렵다. 드러난 모양으로는 보는 사람마다 읽어내는 시각의 차이로 말미암아 각기 다른 견해를 표하게 된다. 또한 드러난 것이 존재의 속성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거나 그 바탕이 부실하다면 사상누각沙上樓閣이라 할 수 있으니 완전할 수 없을 것이다. 유의 근원은 무, 색의 속성이 공이라는 의미를 안고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다라는 근원과 수시로 모습을 달리하는 파도와의 관계로  ,  을 설명하기도 한다.

 

   나무를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뿌리가 부실하다면 드러난 줄기나 가지의 상태가 온전할 수 없다는 것은 무와 유의 관점이며, 토양이나 기후조건에 맞지 않거나 그 해의 일기조건이 온전하지 않다면 나무의 생장이 온전하게 되기 어렵다는 건 공과 색의 관계이다.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토양이나 기후 등의 환경적인 요건은 나무라는  의 생장을 돕는 바탕으로  모습을 달리하는 속성인 이라 볼 수 있겠다.

 

   나무는 토양을 포함한 무한한 환경조건인 라는 바탕에서 존재의 실과 부실不實의 여건인 로 드러난다. 묘목이 시간이 지나서 큰 나무가 되며 잎사귀만 있던 시기를 지나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시간의 경과가 주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이며 그때그때 드러나는 결과가 이라고 볼 수 있다.

 

   나무는 그 바탕인 무나 속성인 공의 처지에서 유로서나 색으로 바라보면 변하는 존재로서 늘 그 모습이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러기에 뿌리를 돌보지 않고 나무만 쳐다보고 열매를 수확하기를 기다린다면 그 결실은 어떠하겠는가? 나무의 바탕이 되는 토양과 환경이야말로 나무라는 존재의 가능성을 결정하는 근원이라서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도가道家  , 불교의  

 

   도가의  의 상대 개념으로서의 무, 발생론적 근원으로서의 무, 빈 공간의 쓰임으로서의 무, 유가의 인위도덕에 상대되는 자연주의적 가치관으로서의 무, 사물의 존재 법칙으로서의 무 등 다양한 함의를 지닌다. 여기서 현상적 존재의 존재성에 대한 회의는 찾아볼 수 없으며, 존재에 대한 절대 긍정의 사유 경향마저 나타난다. 이상으로 볼 때 도가의 무란 사물의 기원 또는 법칙성이라는 의미로 요약될 수 있다.

 

   반면 불교의 공 개념은 현상적 존재가 변화 소멸하는 과정 중에 있음에 주목하고, 일체의 실체적 사유를 거부한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선행하는 조건들에 의존하여 임시적으로 있는 것이지 독립된 자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非有). 그러나 임시적으로나마 사물들은 존재하고 있으므로 아예 없다고도 할 수 없다(非無). 현상계는 연기緣起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이므로 변하지 않는 영원한 자성自性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유는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현상계 자체는 이미 구체적인 형상으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존재를 있다거나 없다라며 부정할 수 없다. 이와 같이 현상계가 지닌 무자성의 성질(不有)과 임시적 존재성(不無)은 동일한 대상의 두 가지 모습이다. , 무의 각도에서 보자면 그것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유의 각도에서 보자면 그것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연기의 원칙에 입각해서 보았을 때, 세간이 유라고 하는 것과 세간이 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동일한 세계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은 필연적으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상즉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현상의 그러한 모습을 일러 공이라고 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이치는 곧 사물의 현상적 모습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물의 배후에 설정된 법칙이란 없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인 것이다 1)

1) 도가의 무()와 불교의 공() / 하유진 [출처] 도가의 무와 불교의 공|작성자 임기영자료연구소

 

   집에서 읽는  의 의미

 

   집을 지으려면 건축주와 그 집을 설계하는 건축사가 있어야 하고, 설계도면대로 공사를 하는 시공자가 있다. 건축주는 집을 지으려고 하는 의도를 건축사에게 전달하고 건축사는 건축주의 의도를 담아 설계 작업을 한다. 시공자는 완성된 설계 도서로 공사를 하게 된다. 집짓기는 건축주의 의도와 건축사의 설계 작업, 시공자의 공사는 건축이라는 의미의 바탕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만약 건축주와 설계자, 시공자가 열심히 제 역할을 다하지만 서로 다른 관점의 바탕에서 따로 행위를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건축주는 가능한 적은 돈을 들여서 원하는 집을 지으려 하고, 설계자는 작품이 되어야 한다며 외관의 디자인이 강조된 독특한 집을 설계하고, 시공자는 건축주가 제시한 금액이 공사비로 부족한데도 이윤을 남기는 공사를 하려 한다. 이렇게 집이 지어졌다면 그 결과가 만족스러울 수 있겠는가? 그들이 행하는 사고의 바탕에는 좋은 집이 아니라 각자의 욕심으로 가득 했으니 결과에서 보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하자요인을 안고 있는 문제 덩어리 집이 지어졌을 것이다.

 

   건축은  에서 시작된다. 비워져 있는 대지인  이 집을 지어서 어떻게 살까?’라는 의도가 바로 이다. 공사를 끝내고 지어진 집을  이라고 본다면 라는 바탕에서 마지막으로 드러나는 는 항상 아쉽고 부족하며 행복한 삶이라는 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담아내는 게 쉽지 않다. 대지를 채워 집이 지어졌다. 빈 땅을 보고 건축주의 의도를 읽어내어 건축사가 설계한 도면으로 시공자가 집을 짓는데 삼위일체가 되어 온전한 집을 지어내기 위한 이상적인 바탕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지어진 집을 색이라고 보면 허물어질 때까지 계속 변해간다는 공의 속성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成住壞空성주괴공, 만들어진 존재는 허물어지고 사라지고 만다는 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숙명이자 운명이다. 새집에 입주해서 살게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헌집이 되고 쓰임새가 없어지거나 수명이 다하면 허물어지고 만다.

 

   목조로 지은 한옥은 수백 년을 지나도 존재가치를 유지하고 있으나 철근콘크리트조로 지어진 집은 백년은커녕 오십 년을 버티지 못하고 허물어지고 만다. 목조 한옥은 나무와 흙이라는 자연환경에 취약한 속성을 살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오랜 노하우를 담아서 지어왔다. 튼튼하다는 철근콘크리트조로 짓는 집은 공의 속성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함부로 지었기 때문이다.

 

   온전한 집이라면 를 바탕으로 제대로 그려진 설계에 의해 충실하게 공사가 이루어진 로 지어졌어야 하며, 그 집에는 의 속성을 담아낸 으로서 존재 의미가 담겨져 있어야 한다. 집을 짓는데 관여하는 건축주, 설계자, 시공자는 집을 짓는 바탕이니 각자의 욕심을 줄인 無心으로 집짓기에 임해야 하며, 지어진 집은 삶을 담는 그릇으로 오래토록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는 시간의 속성인 이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집은 지어지는 과정으로 가 바탕이 되어 로 드러나야 하며, 지어진 집은 의 속성을 잘 받아들인 으로 유지 관리되어야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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