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출강했었던 모교의 후배이자 제자들이 사무실을 찾아 왔습니다. 십년 넘게 겸임교수로 강의를 나가다가 3년을 쉬었는데 선배 교수의 요청으로 강의를 다시 시작했지만 한 학기로 그만 두었습니다. 쉰의 고개를 넘기고 보니 교수들도 후배, 외래교수들도 제자들인데다 학생들과는 30년이 넘는 세월차라 어울리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그렇게 한 학기 제 수업을 받았던 자식이라도 막내같은 학생들이 잊을만 하면 찾아 옵니다. 이 녀석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소주 한 잔하는 재미는 자리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재잘 재잘 떠드는 아이들과 잔을 나누면서 어울리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어지간한 시름은 싹 사라집니다.
오늘 찾아온 아이들 중에 한 녀석이 선물이라며 조그만 꾸러미를 내밀었습니다.
"교수님, 나중에 열어 보세요"
뭘까 궁금했는데 나중에 열어 보라고 해서 집에 도착하자말자 서둘러 풀어 보았습니다. 작은 쇼핑백 안에는 손편지와 볼펜 한 자루가 들어 있었습니다. 손으로 쓴 편지, 지금은 쓰기도 받기도 어려운 지난 시절의 흔적 같은 것이지요. 깨알같은 글씨로 정성들여 쓴 편지에 읽기 전에 벌써 감동입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가르친 과목은 건축설계였습니다. 선물을 준비했던 그 학생은 눈에 띄게 작업을 잘 했지만 성격이 내성적이라 발표를 시켜보면 좀 소극적인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말로 발표 능력을 배우면 어떻겠느냐고 하면서스피치 학원을 다니기를 권했었지요.
제가 강의를 그만두었던 2학기부터 그 학생은 제가 권하는대로 스피치학원을 다녔었던가 봅니다. 학원을 다니면서 그 학생은 발표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을 뿐 아니라 성격까지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학원에서 자체적으로 정기적으로 경연대회를 하는데 일등을 했었다고 합니다. 일등상으로 파카볼펜을 받고는 제게 선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네요.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데도 꽤나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강의를 나갈 때 학생들과 술자리를 만들면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반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 반도 안 되는 제 팬 중의 열 면 정도가 돌아가면서 찾아 줍니다. 강의를 나가지도 않는 어려운 선배를 이렇게 찾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이런 깜짝 선물까지 받으니 아이들 말로 대박입니다.
30년을 뛰어 넘은 나이 차이에도 몇 시간을 웃으면서 같은 공감대를 가지고 얘기를 나눌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면서 이렇게 누군가를 찾아가고 함께 자리를 하는 아나로그식 만낭은 차라리 이벤트가 되어버렸습니다. 카페에서 테이블을 가운데로 마주 앉아서 카톡으로 얘기를 주고 받는 세대들과 소줏잔을 기울이면서 맘껏 웃으며 건축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저는 행운아라는 격한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소주 자리로 헤어지기가 아쉬워 2차로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주책스럽게도 제가 아이들보다 얘기를 더 많이 했었던 것 같습니다. 더 늦으면 안 되는 시간이 되어 헤어지면서 악수를 청하는 제게 안아달라고 하는 녀석들이 얼마나 이뻤는지 모릅니다. 그 아이들을 껴안으면서 마음에 늘 품고 험난한 인생길을 잘 안내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밀려왔습니다.
손으로 쓴 편지와 함께 제게 온 볼펜으로 답장을 보내줘야겠습니다. 짧은 글보다는 좀 길게 써서 곱게 접어서 넣은 편지봉투에 이왕이면 소인보다는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어 보내고 싶습니다. 우표가 붙은 편지를 받아보는 제자의 표정을 상상해 보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아날로그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정, 아날로그인 제가 있어서 디지털의 제자들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오늘은 뭐라뭐라해도 정 때문이라고 우기고 싶습니다. (2015.03.21)
무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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